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고려]] 말기인 [[1388년]], [[요동정벌]]을 위해 출격한 [[태조(조선)|이성계]]가 [[위화도]]에서 회군하여 일으킨 [[쿠데타]]. 고려의 멸망과 [[조선]]의 [[건국]]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으로 유명하다. [[명나라]] 태조 [[홍무제]] 주원장과 철령위(鐵嶺衛) 문제를 놓고 분쟁을 벌이던 고려에서,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있었던 [[태조(조선)|이성계]](李成桂), [[조민수(고려)|조민수]] 등의 무신들은 [[서경(고려)|서경]]에서 국경 지대 [[압록강]]의 섬인 [[위화도]]까지 19일에 걸쳐 북상했다. 그러나 이내 그대로 군대를 돌려 '''9일'''만에 회군(回軍)해 개경의 수도 방위군과 [[최영]]을 제압하고 조정을 장악했다.[*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... [[서경(고려)|서경]]에서 [[위화도]]로 갈 때는 하루 10km씩 진군{{{-1 (19일 소요)}}}했지만, [[최영]]이 재빠르게 군대를 모아서 항거할 것을 우려하여 [[위화도]]에서 [[개경]]으로 회군할 때는 무려 '''하루 40km'''씩 행군{{{-1 (9일 소요)}}}했다. 참고로 위화도-평양과 위화도-개경의 거리 차이는 2배 정도 난다. 즉, 정벌에 나설 때보다 '''4배'''나 빠른 속도로 돌아와서 최영을 물리친 셈이었다. [[https://m.blog.naver.com/joseon_500/220848607890|참고]]] [[고려]] 제32대 [[우왕]] 14년인 1388년 음력 5월 22일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'''무진년 회군'''이라고도 불린다.[* 이성계 등 회군 주도자들은 훗날 제34대 [[공양왕]] 때 '무진회군공신'(戊辰回軍功臣)으로 책봉되었다] 또한 제31대 [[공민왕]] 때 추진한 [[제1차 요동정벌]]에 이은 두번째 요동 침공 작전이라는 점에서 '''[[제2차 요동정벌]]'''이라고도 불린다. 왕명을 어기고 군 총지휘관이 독단으로 주력군을 움직인 사실상의 쿠데타로, '''이성계에 의한 [[역성혁명]]의 시발점이었다'''. 이후 회군의 수장이었던 이성계는 [[정도전]], [[조준(조선)|조준]], [[남은]] 등 [[신진사대부]] 세력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[[고려]]를 멸망시키고 [[조선]]을 건국하여 직접 국왕에 오르게 된다. [[구한말]] [[호머 헐버트]]는 [[한국사]]를 연구한 자신의 저서[* 국내 번역명 《한국사, 드라마가 되다》]에서 이 사건을 [[율리우스 카이사르]]의 [[루비콘 강]] 도하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다. >[[조민수(고려)|조민수]]가 흑대기(黑大旗)를 들고 영의서(永義署) 다리에서 [[최영]]에게 쫓기는데, [[태조(조선)|태조]](太祖)가 황룡대기(黃龍大旗)를 세우고 [[선죽교]]를 거쳐 남산(男山)에 오르니, 그 먼지는 하늘을 뒤덮었으며, 그 북 치는 소리는 온 땅을 뒤흔들었다. 최영의 휘하 장수 [[안소]](安沼)는 정예병을 거느리고 남산에 웅거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달아났으며, 형세가 다한 것을 본 최영은 화원으로 달려 돌아와 분노를 참지 못했다. >---- >《[[고려사절요]]》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